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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후기

제목 어느 병아리 집사의 성지 순례 이야기
작성자 오안나 작성일 2008-10-20 01:34:36
오랫동안 계획했고 준비했던 성지순례를 드디어 떠났다
오안나
집과 직장 그리고 아이들, 걱정거리는 언제나 있는 법.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뭔가의 걸림돌은 있기 마련이기에 계획대로 무조건 감행하기로 한다. 나머진 모두 그분이 책임져 주실 것이기에…….

우리교회 10명과 개개인 12명등 총 22명이 9월15일부터 23일까지 8박9일 동안 이집트 요르단 이스라엘 3개국의 빡빡한 일정을 함께 하기로 한다.


오후 4시40분 드디어 12시간여의 비행을 시작한다.이집트의 카이로공항까지 책도 읽고 영화도 보고 음악도 듣고 창밖도 보고 하면 금세 갈 줄 알았더니 생각보다 지루하다.

책은 한 5시간 만에 끝났고 영화나 음악은 잠깐이고 창은 승객의 취침을 위해 밖의 빛이 들어오지 못하게 닫아버린다. 유일한 위로라면 긴 시간 비행에 나오는 기내식과 간식이다. 

한 아이가 자기의 꿈이 비행기 조종사라며 그 이유가 “비행기에서 나오는 것이 너무 맛있어서요.” 라더니  나 역시 딱 그 수준인건가?

새벽 4시 40분 현지시각으로 밤 9시 40분(우리나라보다 7시간 늦음) 드디어 이집트 카이로 공항에 도착했다. 손목시계를 현지 시각으로 맞추고서 공항 안까지 나와 대기하는 현지가이드를 따라 이집트 땅을 밟는다.


카이로 국제공항 후훗 웃음이 나온다. 우리나라의 어느 허름한 지하철 역사 수준이다.그런데 그나마 새로 신축한 신공항이라니 할 말이 없다. 무표정한 공항직원에 허름한 공간, 일행이 없다면 어디 잘 못 온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다.

현지 가이드 ‘마호메트’와 한국 가이드 ‘강순화’씨를 만나 버스를 타고 피라미드가 있다는 기자지구의 호텔로 이동했다. 1시간여의 버스에서 본 이집트는 우리나라의 재개발지구를 보는 것 같다. 미처 완공이 덜된 듯이 여기저기 나와 있는 철근들. 알고 보니 집은 언제나 필요할 때 조금씩 지을 수 있게 미완성인 채로 산다고 한다.


거리에서 보이는 집들은 마치 사람이 살지 않는 폐허를 보는 듯하다. 도로 역시 차선이 없는 곳이 많다. 알아서 지그재그로 추월하고 비켜가고 있다. 가이드 설명대로라면 차선과 신호등이 별로 없단다. 그러고도 큰 사고가 없다는 게 의아할 뿐이다.
 
숙소로 옮겨가는 한 시간여의 풍경을 보니 드디어 지구 반바퀴를 날아 왔다는 게 실감이 난다. 밤이지만 현재 이슬람교의 라마단금식기간 (해가 떠 있는 내내 음식을 먹지 않고 해가 진 후에야 먹을 수 있음 - 9월 한 달 동안 지속됨)탓인지 특유 복장의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있다. 

그리고 염려만큼 덥지 않고 도리어 선선하다.
피라미드로 유명한 기자 지구에서의 첫째날 밤.

아침에 눈뜨면 혹시 창밖으로 거대한 피라미드가 보이는 것은 아닐까? 기분 좋은 상상을 하며 피곤한 몸과 긴 시간 자지 못했음에도 깊게 자지 못한 채 둘째 날을 맞는다




둘째 날, 이집트를 대표하는 피라미드 보러 이동

이른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많다. 대부분의 관공서가 9시에 문을 여는 우리와 달리 이곳은 8시부터 입장 가능이다.

날이 더우니 일찍 열고 그리고 일찍 닫나보다. 어디에서 몰려왔는지 수많은 인파들이 벌써 들어와 있다. 기자지구의 세 피라미드와 스핑크스를 보고 4,300년 전의 그 시절로 돌아가 보다.


웅장한 피라미드를 보고 감탄사가 나오기보다 연대의 과학으로조차 풀 수 없을 만치 힘든 일을 해야 했던 노예들이 떠올라 마음이 아팠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쿠푸왕의 피라미드와 그 옆의 카프라왕 그리고 안쪽의 맨 카우라왕 그리고 차로 10여분 이동해 스핑크스를 보았다. 

쿠푸왕의 피라미드는 가장 큰 피라미드로 내부 관람이 가능한데 맙소사!!  선착순 150명만 받기에 단체관람은 제외란다. 아쉽지만  작은 카프라왕의 피라미드내부를 보기로 한다.

카프라왕의 피라미드로 가기 전에 한명의 베두인이 접근한다. 손에 조그만 파란 돌을 쥐어주며 큰소리로 외친다.“노머니”“노머니” 그리고선 남편의 머리에 아랍특유의 터번을 돌돌 씌우고 내 머리에다가는 붉은색 터번을 씌운다. 

그러면서 연발하는 말 ‘노머니’ 우린 너무 순진해 그 말을 그대로 믿었으니.. 우리의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주고서 다시 하는 말 “텐달러”
맙소사, 우린 가이드의 설명대로 원달러 만을 주고 우리도 한마디 “노머니”

그러자 손에 준 파란 돌도 다 가져가고 만다.어쨌든 우린 현지인 분위기의 사진 한 장을 얻었으니 원달러가 아깝지 않다. (지금이니까 그렇지 당시엔 당했단 생각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유독 사진촬영에는 인색한 나라다. 입구에서 카메라를 다 검사한다. 입구가 워낙 좁아 거의 몸의 절반을 구부리고 들어가야 한다. 게다가 입구와 출구가 같아서 비좁기 그지없다. 온몸은 땀으로 흠뻑 조금만 몸을 일으켜 세워도 머리가 부딪힌다. 그런데 내부엔 결정적으로 아무것도 없다. 당시 무덤이 있었다는 장소만이, 하지만 어떠랴 과거 속을 직접 들어갔다 나왔다는 사실만으로도 뿌듯하다.

현대의 과학으로도 풀 수 없는 신비로운 이곳이 단지 왕들의 사후세계를 위한 무덤이었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덕분에 현재의 이집트는 그로인해 큰돈을 벌어들이고 있다지만...

차로 10여분 이동해 스핑크스를 둘러보다. 매체를 통해 너무 많이 보아온 탓에 그러려니 싶다.


다음으로 간 곳은 예수님이 헤롯왕의 박해를 피해 한 달 정도 머문 곳을 기념하기위해 세운 ‘예수피난교회’이다. 역시 촬영금지로 기억이 가물거린다.

내부에 12개의 기둥이 있었는데 그 중 한 개만이 아무런 장식도 없다. 12제자를 뜻하며 다른 한 개는 갸롯유다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크리스천이라면 쉽게 알 수 있을 터이다. 


올드 카이로길을 조금 걷다가 당도한곳은 모세기념회당 서기 1115년에 ‘벤 에즈라’에 의해 재건되어 벤 에즈라 회당이라고도 부른다. 모세를 나일 강에서 건져 낸 곳을 기념하기위한 회당이다. 이곳 역시 사진촬영 금지.

다음번 방문지는 카이로국립박물관이다. 역시나 촬영금지. 우리나라도 박물관에서의 촬영은 금지이니까 이해는 하지만 쩝...아쉽다.


박물관은 마치 시장 속 같다. 가이드의 설명을 듣느라 귀는 쫑긋 세워야하는데 여러 나라 말들이 섞여 여간 혼잡한 게 아니다. 그리고 덥기는 세상에나, 국립박물관이 선풍기 몇 대로 유지되고 있다.

유일하게 도굴당하지 않은 투탕카멘의 유적만이 에어컨이 켜진  유리 문안에 전시되어있다. 우리가 익히 아는 황금가면 등이 있으며 고대문명의 발상지답게 당시 앞서간 문화를 충분히 느낄 수 있다. 박물관에서의 촬영금지는 아마도 유물보호보다는 열악한 그들의 현실을 밖으로 새나가지 않게 하기 위함은 아닌지 하는 말도 안 되는 생각까지 들 정도다.


한국식당에서 점심을 맛있게 먹었다. 한국 사람이 운영하는 곳인지 우리 입맛에 잘 맞다. 김치가 나오고 불고기 상추쌈이 있는데 며칠이나 되었다고 반갑기 그지없다. 서빙하는 잘생긴 이집트총각들도 한국말을 잘한다. 꽤 기분이 괜찮다. 

점심을 잘 먹고 출애굽여정을 우리는 에어컨이 잘 켜진 버스를 타고 시작이다. 8시간에 걸친 내내 광야가 끝없이 펼쳐진다. 붉은 자갈 우리가 알고 있는 사막도 아니요  말 그대로 황량한 황무지 같은 길이 지치도록 펼쳐진다. 홍해를 해저터널로 통과해 아쉬웠지만 어쩌랴.

다음 만난 곳이 마라의 샘.


역시 황무지 한가운데 먼지를 뒤집어쓰고 더러운 물이 담겨있는 우물하나가 있을 뿐이다. 종려나무가 있긴 하나 먼지 때문에 녹색이 아닌 회색으로 보인다. 건너 홍해로 무심히 해가 지고 있다.


밤 10시 경에 시내산근처 ‘캐더린빌리지’ 라는 숙소에 들다. 숙소의 위치가 해발 1,500m란다.

밤늦게 도착한 숙소지만 언뜻 보아도 요새 같다. 막연하게 시내산을 연상케하는 느낌이다. 그런데 그 곳에서 두어 시간 지내야한다는게 아쉽기만하다. 내일은 새벽 1시 30분부터 출발하여 시내산에서 일출을 보게 되어 있는 것이다. 

삼일 째의 하루는 무척 길 것 같다.




셋째 날, 새벽 2,285m의 시내산에 오르다 

새벽 1시30분.

잠은 한 시간이나 잤으려나 그런데도 피곤한 줄은 모르겠다. 몸 역시 상황을 알고 적응해주나보다. 

버스를 5분 정도 타고 10여분을 걸으니 캐더린수도원앞이다. 오늘 시내산 등반의 집결지이다. 깜깜한 밤중에 가벼운 배낭차림의 인파들이 몰려들고 있다. 다행이 달이 밝다.

낙타를 탈 사람과 도보로 가는 사람으로 나뉘어 줄을 선다.

우리 일행은 모두 낙타를 타기로 한다. 낙타를 타는데 17달러 그중 1달러는 조합비로 먼저내고 순수 낙타 비는 15달러 그리고 원달러는 팁이다.

낙타주인인 베두인이 이끄는 대로 조용히 따라간다. 일행도 없어지고 말도 안 통해 순간 이상한 기분이 들기도 했지만 뭐 별일 있을라고. 4학년 아줌마의 배짱은 두둑할 뿐이다.

낙타가 위험하다더니(졸기 때문에) 앉는 자리의 불편함을 빼고는 1시간의 낙타타기가 신이 날 정도다. 

두둥실 보름달이 떠있는 밤길에 낙타를 타고 한시간정도 등반하는 기분은 상상에 맡기겠다.


한 가지 흠이라면 잘 가고 있는 낙타를 “얄라 얄라”하며 자꾸 때리는 것이 내게 불편함을 줄 뿐이다. 아마도 빨리 빨리에 해당되는 말인가 보다.

중간 기착지 마호메드 카페에서 따끈한 코코아를 마시며 일행을 기다린다. 4~5개의 카페중 유일하게 한글로 이름이 쓰였다. 중간 기착지에서부터 우리는 다시 계단으로 난 가파른 길을 30여분 올라가 정상 바로밑 5번 카페에서 만나기로 한다. 

우연찮게 우리 팀만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아늑하고 참 좋다.
어느 고산지대 산장에 온 것도 같고 참 편안한 느낌이다.

여기서부터 정상은 5분소요. 정상엔 인파들이 너무 많아 이곳에서 산상예배를 드리기로 한다. 어쩌면 어쩔 수 없는 크리스천이다. 이곳에서의 예배가 이토록 가슴에 와 닿으니.


예배 후 일출 10여분을 앞두고 정상으로 올라갔다.
세계 각국에서 모인 수많은 사람들이 한 곳을 향한다.
해가 떠오르는 그곳 한곳!

여기 모세가 십계명을 받은 2,285m의 시내산 정상에 해를 마주하고 서있는 감격적인 순간이 내 인생의 한 페이지를 차지했다. 말로다 설명할 수 없는 가슴 벅찬 순간이었다.


다시 우린 5번 카페.
원달러의 물 값을 지불하고 컵라면에 더운 물을 붓는다. 시내산 정상에 컵라면을 먹는 민족은 한국인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 여행가이드북에도 친절하게 ‘컵라면을 가지고 가도 좋습니다’ 라고 안내되어있다.
아! 그 맛이란...


내려오는 길, 어두워 잘 보지 못한 그 산이 발아래 들어오며 왠지 모를 뿌듯함과 감격스러움에 주체할 수 없다. 어두워서 올라갈 땐 제대로 보지 못한 뻘건 바위산이 하나하나 정겹고 그냥 널린 산이 아니라 나와 관계가 있는 소중함으로 다가온다.

이제 삼일째이지만 이 새벽 시내산 등반이 이번 성지순례에 있어서 큰 비중을 차지하리라 확신한다.


아침을 숙소에서 계란 한 개 오이 몇 조각으로 때우고 (파리등살에 뭐 먹을 수조차 없다) 새벽 집결했던 성캐더린 사원으로 들어갔다.

짧은 반바지는 입장불가 또 원 달러가 등장한다. 하얀 천조각을 주며 다리를 가리고 들어가란다. 이곳의 도서관은 귀중한 성경 사본과 성경 희귀본을 많이 소장한 것으로 유명하다.또한 모세가 보았다는 떨기나무가 이곳에서 자태를 늘어뜨리고 있다.

성경을 읽으며 막연히 생각했던 떨기나무와는 너무 달라 고개가 갸웃거려지기도 했다.


오늘의 주요 일정은 이것으로 끝나 보인다.

누웨바 휴양도시에서 한식으로 점심을 먹고 요르단으로 가는 일이 남았다. 여기서는 국경을 넘는 일이 지치게 한다. 게다가 요르단의 아카바항구로 가기 위해서는 이스라엘을 거쳐 가야 한다는데 이 여행의 가장 큰 관문이 이스라엘 국경통과임을 귀에 딱지가 들어앉게 들었으니 내심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전날 가방싸는것부터 주의 또 주의해야 한다. 옷가지는 아래에 네모난 것 즉 폭발물처럼 보일 수 있는 것은 무조건 위쪽으로 올리란다. 테러의 위험에 노출된 나라이니 이해는 하지만 순수 관광객까지 이토록 불편하게 하는 것은 문제이지 않을까?

정작 국경통과는 기다림의 연속이다. 다 뜯어진 에어컨하나만이 힘을 발휘하는 건물에서 무작정 기다리는데 불평하는 이는 오로지 나 한사람이다.

이렇게 우리는 이집트와 작별했다. 불편한 화장실과 원달러의 악몽까지도 그리워지게 될 것을 벌써부터 예감한다.

다시 이스라엘 국경.
분위기는 이집트와 다르다. 생동감 있고 친절하고 뭔가 공공장소에 온듯하다. 짐을 통과시키고 여권검사를 하는데 나와 또 다른 목사님 부부가 걸렸다. 이놈의 미모는 어디를 가나 속 썩인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이후에도 국경 통과시마다 계속 걸렸다는 것…….

겨우 이스라엘을 통과하여 홍해의 멋진 풍경을 보는 것 까진 좋았는데 요르단의 가이드가 나타나지 않아 또 시간 죽이기다. 요르단은 썸머타임이 시행중이라 인솔자와 사인이 맞지 않았나보다.
기다림 또 기다림 게다가 라마단 기간이라 식사시간과 겹쳐 그 이후에도 기다림의 연속이다.

저녁 8시경 드디어 오늘의 숙소 요르단의 아카바 항구에 도착하다.


아카바는  출애굽당시 한번쯤 거쳐 간 곳으로 성경 속에선 ‘에시온게벨’로 표현하고 있다.

저녁 식사 후 숙소가 아카바시내에 있는 관계로 슬쩍 나왔더니 우리나라 분위기와 비슷하다. 밤늦게 카페 같은데 모여 술 마시는 대신 물담배를 빠는 모습이 특이하다. 긴 병에 호스를 연결해 깊이 빨아들이는 물담배의 풍경이  새롭다. 그리고 여느 도시처럼 익히 알고 있는 다국적기업의 상표들이 즐비하고, 우리나라의 차가 위풍당당하게 도로를 달리고 있다. 이 얼마나 뿌듯한 풍경이든지 괜히 내 어깨에 힘이 들어간다.

짧은 반바지 차림으로 어슬렁 거리다가 여러 시선을 경험한다. 맙소사 짧은 반바지입고 활보하지 말라는 문구를 어디선가 본것도 같다. 회교국가에서 내가 잘못했나? 그러기엔 다른 모양 비슷한 차림새의 외국인들이 너무 많다. 

끝까지 모른 체하고 시장안을 구경하다가 숙소에 슬리퍼가 없어 슬리퍼 하나를 3달러에 샀다. 우리 돈으로는 3000원 조금 더되니 그다지 비싼 것도 아닌데 왠지 ‘원달러’가 아니라서 서운하다. 초등 4학년쯤 되어 보이는 조그만 남자애가 당차게 손님을 받으며 ‘굿’을 연발한다.

밤늦게 잠깐 들러본 아카바시내의 전경이 마음에 남아 왠지 요르단이라는 나라가 친숙하게 느껴진다. 다음날 요르단에서의 일정을 기대하며 항구도시 아카바의 밤은 깊어만 간다.




현대 7대 불가사의로 꼽힌 페트라 유적지를 가다

넷째 날

아카바항구에서 왕의 도로(King's Way)를 따라 2시간을 달려 현대 7대 불가사의로 꼽힌 페트라 유적지로 향했다. 기원전 1세기경의 그리스 양식으로 지어진 고대도시 페트라는 아랍계 유목민 나바테아인이 건설한 해발 95m의 산악도시로서 최고 높이300m의 바위산으로 둘러싸여있다. 페트라는 그리스어로 바위라는 뜻이며 성경속의 셀라라는 말의 변천으로 보고 있다.

입구를 찾기 어렵게 좁은 통로와 협곡으로 되어 있으며, 1985년 유네스코에 등재된 고고학적으로도 유명한곳이다. 또한 영화 인디애나존스의 ‘최후의 성전’의 촬영지로도 알려져 있다.

과거 지진으로 인해 묻혔다가 1812년에 스위스의 여행가에 의해 발견되었다. 좁은 협곡인 시크를 걷다보면 그 사이로 정교하고 아름다운 신전이 보이는데 그 순간이 마치 숨겨 논 보물을 ‘짜잔’ 하고 보여주는 듯 놀랍기 그지없다.


2층으로 된 이 신전은 ‘알카즈네’라고 하는데 이곳 역시 왕들의 무덤이라고 한다. 더군다나 붉은 바위를 깎아 저토록 정교하고 아름다운 신전을 지었다는 사실이 놀랍기 그지없다.


나바테아인들은 유목민으로 늘 장막을 치고 살았으나 죽음 이후의 삶은 영원하다고 믿었기 때문에 이토록 사후의 세계에 모든 관심을 쏟아 부었다. 즉, 살아있는 동안 내내 사후에 거하게 될 집을 지은 셈이다.

아름다운 빛깔의 바위산과 당시의 수로 그리고 바위산을 깎아 만들었다는 원형경기장을 보며 새삼 인간의 위대함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페트라 입구에는 근사한 복장을 한 수문장이 서있다. 우리나라 고궁의 수문장처럼 서 있기에 우르르 모여 사진을 찍었는데 그가 고상한 몸짓으로 조용히 하는 말은 인원수만큼 “원달러” “원달러”를 속삭인다. ‘세상에 요르단 너마저도…….’


알카즈네 앞에도 멋진 옷차림의 남자가 앉아있다. 사진을 찍고 싶어 하자 너무도 자연스레 포즈를 잡아준다. 아마도 경찰이나 페트라 안내인정도 되지 않을까 싶은데 정말 조각처럼 잘 생겼다. 그리고 유일하게 원달러를 요구하지 않은 사람이기도 하다.(문제는 여행 후에 가끔 꿈에서도 나타난다는 것.....)


시크가 2km쯤 되다보니 들어갈 때나 나올 때 말이나 마차 낙타 등을 이용하면 된다. 바닥이 로마시대의 바닥처럼 돌판으로 되어있기에 마차는 너무 덜컹거려 힘들다는 후문이다. 색다른 경험은 모두 환영 나는 말을 타고 나왔다. 덕분에 햇빛에 잘 익었지만. 
말 비용은 2달러이나 그들의 요구는 10달러 그러나 우리가 누구인가? 바가지라면 학을 떼는 대한민국 국민 아닌가!

페트라에는 천연 모래를 이용해 병속에 아름다운 그림을 만드는 사람들이 있다. 순식간에 철사모양의 도구로 뚝딱 만들어 내는데 그 또한 신기하다. 가격은 천차만별 부르는 게 값이다. 병속에 사막이 만들어지고 거기에 낙타가 생기고 야자수가 생기고…….장밋빛 붉은 도시라 칭하는 이곳 페트라에서만이 가능한 상품인 것이다.


아름다운 페트라를 뒤로 하고 우리는 므리바로 향하다. 외부에는 하얀 돔모양의 지붕이 3개 있고 안에는 모세가 반석을 쳐서 물을 내게 했다는 그 갈라진 바위가 있다. 모세와 아론이 결정적으로 가나안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된 샘물이다.(민수기 20:12) 아직도 그곳에선 맑은 물이 철철 흐르고 있다. 


다음 목적지는 카락성.

모압족속의 수도였으며, 현재의 모습은 모압왕국때가 아닌 12세기 십자군 때 지어진 모습이라고 한다. 카락성의 위치는 해발 933m로 그 자체만으로도 천연 요새이다. 모래바람을 막기 위해 밖의 창은 좁고, 안쪽은 밖을 살피기 위해 넓다. 1층부터 7층까지 방 가운데 구멍이 뚫려있는데 이는 밧줄을 이용해 물건을 전달하기 위함과 환기용으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당시의 뛰어난 건축술과 사람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는 곳이다.


어두침침한 그곳에서 나와 이번에 간곳은 성 조오지교회이다. 이 교회에 보존되어 있는 지도는 현존하는 지도 가운데 가장 크고 오래된 것 중의 하나로써 가로 25미터 세로 5미터로 약 230만개의 조각으로 이 교회의 바닥에 선명하게 모자이크 되어 있다. 이 지도로 인해 많은 성지를 발굴해 내었고, 당시 기독교의 융성함을 미루어 짐작해본다.


오늘의 마지막 여정은 느보산이다.

모세가 앞에 보이는 가나안 땅을 들어가지 못하고 눈을 감은 곳.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먹먹해지는 곳이다. 때 맞춰 일몰이 진행 중이다. 모세의 안타까운 마음이 전해져서 인지 숙연해지는 곳이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이는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그 후손에게 주리라 한 땅이라 내가 네 눈으로 보게 하였거니와 너는 그리로 건너가지 못하리라 하시매(신명기 34:4) 

눈앞의 가나안을 보고도 들어가지 못한 모세,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순종했던 모세

그가 잠들어 있다는 느보산 정상에서 가나안땅을 내려다보며 내게 주시는 ‘가나안’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았다.

느보산을 마지막 일정으로 오늘의 숙소인 요르단의 수도 암만으로 이동했다.

어제의 외출에 맞들인 우리는 암만의 밤문화를 맛보러 나갔다.

세상에나 가로수가 다 옆으로 자라고 있다. 암만은 해발 800m고지대에 위치하다보니 바람이 무척 세고 열사의 도시가 아닌 선선하고 아니 오히려 춥기까지 하다. 그 바람 탓에 가로수의 모양이라니…….

호텔을 나와 한 방향으로 걷다보니 양고기 집이 있다. 냄새가 고소하다. 이곳에선 최고의 요리가 양고기라고 한다. 내 코엔 삼겹살을 떠오르게 하지만 이쪽 지역에선 돼지고기가 금지이니 생각뿐 이곳 암만에서 양고기 냄새를 맡으며 상추위에 올려진 삼겹살을 꿈꾸다. 한국에 돌아가면 제일먼저 삼겹살을 먹으리. 암만 그래야지.

밤이 늦은 탓인지 거리는 조용하다. 추운 밤거리를 걷다가 눈에 보이는 육교 하나를 건넜더니 아뿔싸 한번 나온 호텔로 돌아가기가 쉽지가 않다. 무단횡단을 해야 하는데 신호등이 없어서인지 차의 흐름이 끊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암만에서 마치 유치원생마냥 길을 건너지 못해 헤매고 말았다. 현지인들은 너무나 가볍게 무단횡단을 하던데 교통질서에 대해 어려서부터 너무 잘 배운 우리에겐 그림의 떡이다.

결국 호텔을 한참이나 지나 다시 육교로 건넜다. 아! 무단횡단을 하지 않는 새 나라의 어른!

바람소리로 머리가 윙윙거릴 지경이다.

내일은 드디어 이스라엘 입성이다.




사해에서의 즐거운 시간 그리고...

다섯째 날


요르단과의 아쉬운 작별이다. 오늘은 다시 이스라엘 입성. 국경통과가 또 숙제처럼 들어있다. 통과해 보니 별것도 아니건만 겁은 하여간에…….

모든 발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겨우리만큼 설명해댄다. 그만큼 어렵단 뜻이겠지만 겪어보지 않은 우리로서는 좀 오버란 생각이 든다.

요르단 암만에서 7시에 출발하여 예루살렘에 10시 도착. 이스라엘 가이드는 ‘임채정’전도사님이다.

찬송가 347장 ‘허락하신 새 땅에’를 함께 부르며 예루살렘에서의 일정을 시작한다. 크리스천이라면 꼭 한번쯤은 가보고 싶어 하는 이곳에 나 같은 병아리집사도 허락해 주심에 감사하다. 

이스라엘에서 처음 간곳은 쿰란 사해사본 발견 장소. 파란하늘과 눈부신 태양 그늘이 없으면 눈을 뜨기조차 힘든 그곳에 섰다.

1947년 베두인의 목동에 의해 발견된 사해사본 또는 쿰란사본은 성경학적으로 볼 때 금세기 최고의 위대한 발견이라고 한다. 기원전 2000년경에 쓰인 이 사본으로 인해 우리가 읽는 성경의 역사성과 진실성이 증거 된 것이다. 얼마 전 우리나라에서도 (용산의 전쟁기념관) 꽤 오랫동안 전시를 했던 기억이 났다.

그곳에서 사본의 배경과 발견 과정을 짧은 비디오로 보았다. 다행히 우리말 더빙이 있다. 대한민국의 파워가 여기까지 미치는 것을 보니 기분이 좋아진다. 


이어지는 곳은 다윗이 사울 왕을 살려주었다는 엔게디 공원이다.최근 우리교회 수요예배 말씀이 사무엘상인데 이곳에서 눈으로 그 현장을 보니 왠지 내가 굉장한 곳에 와있단 생각이 든다. 다윗이 사울 왕을 살려준 증거물을 들고 이쪽 능선에서 저쪽편의 사울 왕에게 소리치는 장면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간다.

마른 사막한가운데 있는 엔게디 공원은 그들의 말로 번역하면 ‘들염소의 샘’이라고 한다. 그 말에 어울리게 여기저기에 들염소가 뛰어다니고 멀리 가느다란 폭포가 흘러내린다.

폭포가 있다는 설명에 막연하게 제주도의 천지연정도를 생각했었는지 내마음속에선 ‘에게게’ 소리가 절로 났지만 (저건 우리나라에서는 폭포라고 명함도 못 내밀어) 물이 귀한 이곳에선 그 정도의 폭포라면 굉장한 거란다.


다음은 기대해 마지 ​​​​​​않았던 사해체험.

야호 신난다.

점심을 거하지만 먹을 게 없이 치루고 (양고기 샐러드 빵 커피..)그 어는 것 하나 입에 맞는 것이 없이 지금 이글을 쓰는데도 그날의 광경이 떠올라 느글거린다. 어쩌랴 이 순 토종을...

점심 후 사해에서 잠시 여유있는 시간을 가졌다. 누구나 둥둥 뜬다는 사해지만 수영을 전혀 못하는 사람은 바다에 몸을 맡긴 채 눕지를 못해 쉽게 경험해볼수는 없다. 게다가 일어나기가 눕기보다 더 어렵다. 일행들이 일어나다가 눈에 물이 들어가 정신을 못차린다. 그 따가움이란 잠시도 견딜 수가 없다고 한다. 

보통 바다의 염도가 4~8%라고 하나 이곳 사해의 염도는 28~33%라고 하니 어찌 따갑지 않겠는가.

아토피가 있던 최병희 목사님의 4째 아들 ‘찬유’의 우는 모습이 생생하다. 몸에 조금이라도 상처가 있으면 무척 아프다. 나 역시 피부염 때문에 고생하는데 따가워서 사실 혼났다. 가벼운 피부염은 쉽게 낫는다기에 참고 견뎠으나 이 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몸의 여기저기를 벅벅 긁고 있으니... 사해보다 독한 피부병이여.


어쨌든 생물이 살수 없어 ‘죽음의 바다’로 불린 사해가 지금은 풍부한 미네랄과 머드덕분에 사해비누 사해머드등 물건마다 사해란 이름을 붙이고선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

사해에서 푹 절인 우리는 머드팩으로 옮겨 천연 미네랄로 온몸을 바르다.

맙소사 목사님도 장로님도 권사님도 망가지는 건 순간이다.서로가 서로에게 웃음을 주는 짧은 시간 피부에도 좋고 그리 많이 웃었으니 엔돌핀도 팍팍!!

순례 중에 맛보는 즐겁고 신나는 시간이었다. 개인적으론 근처에서 1박하고 좀 더 놀고 싶었는데…….(병아리집사 티가 팍팍나는건 어쩔 수가 없다)


다음 일정은 갈릴리.

사해를 옆에 두고 가는 길에 여리고 에서 삭개오의 돌무화과나무를 보고 (뽕나무가 아니랍니다) 엘리사의 샘에서 역시 아직까지 퐁퐁 솟는 물에 손 한번 담그고 멀리 시험산을 조망해본다.


갈릴리호수에 도착했을 때는 해가 뉘엿뉘엿 지려고 한다. 예정대로 배를 빌려 타고 강바람을 맞으며 선상예배를 드렸다. 목사님이 세분이나 계시니 예배 때마다 은혜스럽고 참 행복하다.

바다라고도 하고 호수라고도 하기에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큰 호수인줄 알았더니 내 눈엔 그냥 제대로 호수로 보인다.

세월이 4000년이나 흘렀으니 지형도 당시와는 크게 변했으리라 추정한다지만, 강바람을 맞으며 한 바퀴 휙 도는데 선상 이벤트 짜잔. 애국가가 울려지고 다윗의 별을 상징하는 이스라엘의 국기와 함께 태극기가 게양된다.

머나먼 땅에서 펄럭이는 국기는 사람의 마음을 숙연해지게 한다. 나라밖에선 다 애국자가 된다더니, 한 번의 감동은 원달러의 팁으로 곧바로 이어진다. 역시나 싶지만 그래도 아깝지 않은 순간이다.


오늘의 숙소는 갈릴리 호숫가이다. 베란다 문을 열면 갈릴리 호수가 파랗게 보이는 곳, 이스라엘에서의 첫 날 밤이다.




여섯째날, 수많은 기념교회와 기념터를 둘러보다

오늘은 여느 날과 다르다. 며칠 남지 않은 날수를 헤아려보며 미리부터 아쉽다. 아직 이틀의 일정이 남아있고 돌아가는 날 하루까지 합하면 아직도 3일이 남았는데 벌써부터 허전함이 밀려온다. 여하튼 허튼 생각 그만하고 빡빡한 오늘 일정이나 잘 따라가고 볼 일이다. 

갈릴리 북쪽으로 이동하여 팔복산 기념교회가 오늘 첫 번째 목적지이다. 

심령이 가난한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마:3~10) 

예수께서 산상복음을 전한 곳을 기념하는 팔복교회는 주님이 8가지 복을 얘기한 것을 기념하여 지붕이 팔각형인 것이 특징이다. 우리가 갔을 때는 그 곳에서 미사가 진행 중이었다. 

우리는 팔복교회 앞에서 국악찬양을 하셨던 양산에서 오신 윤성애 권사님을 따라 함께 '심령이 가난한자는'찬양을 팔복교회를 바라보며 불렀다. 양산에서 이 여행을 혼자 오실만큼 멋진 윤권사님은 한국에 와서도 문자를 주고받으며 다시 만날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좋은 사람과의 만남은 여행이 주는 또 다른 즐거움이다. 

팔복교회에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요한 삼서 2절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다음은 베드로 수위권교회. 

이곳은 부활하신 예수께서 갈릴리에 다시 오셔서 고기 잡는 어부로 되돌아 와있는 베드로에게 나타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고 물으시면서 "내 양을 먹이라"고 당부하시던 곳 (요 21:15 ~ 23)을 기념하여 세운 교회이다. 
천국의 열쇠를 쥐고 서 있는 베드로 동상 앞에서 사진을 찍기에 급급했던 생각만이 떠오른다. 

또 하나 용서의 땅이란 설명과 함께 갈릴리 호숫가에서 미워하는 사람을 이곳에 떨궈버리고 가자는 임전도사님의 말씀이 생생하다. 어느 권사님은 들기도 힘든 만큼 큰 바위를 엄숙한 자세로 내어 던지고 몇몇은 물수제비를 뜨며 장난을 치기도 했지만 성지순례에서 만이 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순간이었다. 호수에 무슨 돌멩이 하나 던지는 게 무어 그리 대수냐고 한다면 할 말이 없지만 ……. 


다음 일정에서 오병이어 교회는 생략하고 말았다. 8박 9일의 일정에 3개국은 너무 무리였으니 어쩌랴. 대신 실제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명을 먹이신 뱃세다 언덕을 요단강 상류에 서서 바라보았다.  무리가운데 서서 축사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애써 그려보았다. 

요단강이라 하면 막연하게 아주 큰 강으로 생각했으나 막상 와서 보니 강이라고 하기엔 너무 작다. 교회에서 그 사진을 보여줬더니 “이건 우리 동네서는 둠벙이라 하는데” (웃음)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요단강, 말씀 속에서, 찬양속에서 자주 만났던 요단강이 작고 초라한 개천수준이다. 급실망하는 티를 내지 않으려고 나름 노력했다.


다음 간곳은 가버나움. 

예수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베푸신 고을이나 회개하지 아니하므로  책망 받았던 도시로 알려져 있다. 가버나움은 예수님 당시 가장 번화한 도시였으며 가장 많은 이적을 행한 곳으로 당시의 규모를 알게 해주는 회당 터와 아름답고 웅장한 기둥들이 많이 남아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저주 탓이지 흔적만 남아있다. 그 흔한 기념교회로 새로 지어지거나 복원하지도 않은 채 베드로의 집터였던 곳에만 팔각형의 낮은 교회가 세워졌을 뿐이다. 

그런데 순례객에게는 그 터가 그대로 남아있는것이 얼마나 다행스럽던지 성지순례를 와보니 대부분이 기념교회가 세워져 당시의 상황을 제대로 읽을 수 없는 게 아쉬움이었는데 비록 흔적과 잔해일지라도 그로 인해 더 많은 상상력을 하게 되고 당시의 느낌을 더 잘 알 수 있게 한다. 
어쨌든 무너진 가버나움을 보며 다시 한 번 우리의 신앙을 재점검해 볼 필요를 느꼈다. 


상류 요단강을 보며 급실망했던 우리는 요단강 세례 기념터로 가서 조금 회복하고 돌아왔다. 같은 요단강일진대 기념터로 꾸며 놓으니 훨씬 나아보였다. 사람이나 물건이나 다 꾸미기 나름이다. 이곳에서 침레교인들은 흰옷을 구해 입고 침례의식을 행하기도 한다는데 우리가 갔을때는 그러한 의식을 치루지 않아 볼 수가 없었다. 

최병희 목사님은 다음 세례식때 이물을 쓰시겠노라고 그 와중에 페트병에 요단강물을 담는다. 당시엔 세례식을 하기엔 물이 깨끗지 않다는 생각만을 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 열정이 놀랍기까지 하다. 아마도 김해 호산나교회에서는 이번 추수감사절에 참 의미 있는 세례식을 치루셨을것 같다. 
그때까지 냉장보관 잘 하셨는지요?


가나마을 혼인잔치 기념교회. 

예수님께서 처음 기적을 행하시고 그 영광을 나타내신 곳이다. 유대인의 결혼식은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이 잔치에 참석했기 때문에 음식과 포도주가 동이 나는 경우가 허다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잔치에서 예수님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어 잔치를 계속할 수 있도록 기적을 베푸셨다. 왜 하필이면 예수님께서 행하신 첫 기적이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것이었을까?  

그곳에서 빠질 수 없는 찬양 한곡, ‘예수님이 말씀하시니 물이 변하여 포도주 됐네. 예수님이 말씀하시니 물이 변하여 ~~ ' 최병희 목사님의  율동을 따라하며 잠시 유치부가 된 것처럼 귀여운 척도 해보다. 

이곳에선 각자 부부끼리 모여 손을 붙잡고 ‘부부를 위한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의 첫 번째 기적을 혼인잔치에서 베푸신 것은 그만큼 결혼생활의 중요성을 역설한 것이란 생각에.


가나 혼인잔치 기념교회에서 나오다보니 커다란 태극기가 걸려있는 상점이 하나 나온다. 

우리와 같은 순례객을 겨냥한 곳이겠지만 이국땅에서 보는 태극기는 그것의 목적과는 상관없이 뭉클해지는 그 무엇이 있다. 성찬식을 위한 포도주를 맛보며 사가기도 하는 곳이다. 한국 사람이 많이 오는 탓에  쇼핑에 불편함이 없다. 그런데 문제는 별로 살 것이 없다는 것. 


그곳에서 나와 버스를 찾지 못해 조금 헤맸다. 수많은 순례객들이 다녀가는 그 곳이지만 변변한 주차장 하나 없어  버스는 늘 다른 곳에 대기하고 있다가 나타나는데 이번엔 쉽게 찾아지지 않는다. 분명 여기가 좀 전에 내렸던 곳인데. 

길거리를 배회하다 만난 과일장수, 
뷔페에서 가끔 나왔다가도 금세 사라져 버리는 맛있는 포도를 한바구니 가득 5불을 주고 샀다. 인솔자는 무화과를 쏜다. 앗싸! 오늘은 과일 좀 실컷 먹을 수 있겠다.
 잘 짜여진 코스대로 움직이는 것보다는 이런 시간도 좀 필요한데 패키지여행은 너무 여유가 없는 게 흠이다. 

차에서 슥슥 먼지만 떨어내고 무화과를 한입에 털어 넣는다. 무화과를 처음 먹어본다는 분들이 계시기도 하다. 햇빛을 받아 잘 익은 탓에 맛이 좋다. 과일이 싸기도 하려니와 맛도 좋으니 많이 먹어봐야 할 텐데 도무지 그런 짬조차 나지 않는다. 

다음은 수태고지 기념교회. 

좁은 시장 통을 지나면서 생경한 그들 문화를 잠시 잠깐 맛보며 다음 목적지로 향하다. 시장속 풍경은 우리와 별반 다를 바 없다. 
시장입구의 작은 골방 같은곳에서 회교도들이 모여 한 방향으로 절을 하고 있다. 삶 자체가 종교인 그들의 열정이 무섭기까지 하다.


마리아수태고지기념교회는 말 그대로 마리아에게 천사가 와서 성령으로 잉태되었음을 알렸던 곳을 기념하여 지은 교회이다. 교회의 외관이 화려하고 아름다우며 교회 앞마당엔 50여개 나라에서 보내온 성화가 빙 둘러져 있다. 각 나라 특유의 느낌으로 만들어진 모자이크를 감상하는 것도 참 재미있는 일일 것이나 시간관계상 거의 훑어보는 수준이었다. 

우리나라는 치마저고리의 성모마리아가 색동저고리의 아기예수를 안고 있는 모습이다. 


그 다음엔 요셉교회와 생가터를 둘러보았다는데 머리의 용량이 다 되었나보다. 사진도 있고 다녀온 것도 같은데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다. 아침부터 너무 많은 기념교회를 돌다보니 한계에 이른모양이다. 

이번엔 점심식사시간이다. 

임전도사님의 강추인 스파게티를 먹으러 근처 전문점으로 갔다. 아마도 꽤 유명한 곳인가 보다.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사람이 많다. 게다가 각각 다른 말들이 섞여 혼잡스럽기 이를 데 없다. 스파게티도 코스처럼 나온다. 빵부터 시작해서 주 메뉴인 스파게티 그리고 고기류 …….보기엔  마치 국수를 간장과 케첩에 비벼놓은듯한데 제법 맛이 괜찮다. 그 맛에 사람들이 이토록 많이 몰리나보다. 
호텔식이 아닌 것만도 감사하다.


다음은 므깃도. 

BC 4000년부터 6세기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 최고의 요새로서 가장 많은 전쟁을 치룬 도시이다. 이스라엘 최고의 곡창지대인 이스르엘 평야에 위치하고 있으며 남과 북, 동과 서의 도로를 이어주는 교통의 요지이다. 이스라엘을 침략하기 위하여 제국의 군대들이 이곳을 통과하여야 하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이스라엘 안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가 많이 벌어졌던 곳이다. 
마치 대륙국가와 일본 사이에 낀 우리나라와 닮은꼴이다. 

지하로 내려가는 통로와 수로장치 등으로 인해 당시의 기술력과 군사력 등을 가늠해본다. 요한계시록에 기록된(계16:16) 아마겟돈은 ‘므깃도 산’이라는 히브리말을 희랍어로 옮긴 것이라 한다.


갈멜산에서 쌓은 번제물을 불로써 태워 버린 여호와여 
엘리야의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 


다음 목적지가 갈멜산이라고 하자 ‘엘리야의 하나님’이란 찬양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참 하나님을 가려내고자 갈멜산 제단위에 제물을 올려놓고 바알 추종자들과 엘리야 선지자가 맞대결을 펼친다. 
눈물로 간구하는 엘리야의 기도에 불로 응답하신 하나님, 당시의 현장이 눈앞에 펼쳐진다. 

숲속에 구멍이 숭숭 뚫린 바위들이 마치 불길이 지금 막 휩쓸고 지나간 듯이 느껴진다.


갈멜산을 내려와 가이사랴에 도착했다. 이곳은 지중해 연안의 항구도시이다. 헤롯은 길이 600m와 300m의 방파제를 만들어 훌륭한 항구를 조성하고 웅장한 로마식 도시를 건설하였다. 그리고 도시 이름을 황제의 이름을 따서 ‘가이사랴’라고 하였다. 지중해에 아직까지 남아있는 방파제를 훑어보고 고운 모래가 깔린 바다에서 잠깐의 휴식시간 

잔잔한 바다에서수영을 하며 깨끗한 지중해를 즐기는 이들이 많은데  우리는 여기까지 와서 겨우 발 한번 담그고 가야 한다는 게 너무 아쉽다. 게다가 가이샤라에는 당시의 유적이 많다고 하는데 우리는 겨우 방파제인지 수로인지만 확인하고 돌아서다니....


게다가 다음 다음 목적지는 숙소이다. 팔레스타인계 운전기사가 늦어도 6시 30분까지 돌아가야 한단다. 우리나라 노동법처럼 하루 근무시간이 명확하다. 그나마 라마단기간이라 이 사람이 종일 물 한 모금 안마신채 운전을 했기 때문에 귀가시간만큼은 맞춰줘야 한다. 
오호 통재라!! 

아쉬운 지중해의 풍광은 가슴에만 담아두고 베들레헴 숙소로 이동하다. 
오늘로 6일째. 
가장 빡빡한 일정이었고 일정을 쫓아다니기에 급급했기에 아쉬움이 많았다. 
밤 시간엔 자유롭게 거리의 풍경도 보고 일정외의 시간도 갖고 싶은데 호텔밖은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이다. 
근사한 수영장도 밤 기온이 낮아 무용지물이다.

내일의 일정도 만만치 않기에 이 밤은 그냥 엎드려 자라는 얘기인가보다. 




칠일째, 베들레헴에서 주일을 보내다.

오늘은 주일이다. 

호텔 세미나실을 빌려 주일예배를 드렸다. 예수님이 탄생하신 이곳 베들레헴에서 주일예배를 드리는 감격스러움을 어찌 말로 설명할 수 있으리오. 
세분의 목사님과 함께 하는 여행은 개인적으로 참 행운이다.
오늘 예배 인도는 용산에서 시무하시는 김욱목사님이시다.
어쩌면 쉬러 오신 여행에 또다시 주일예배를 인도하게 하시니 조금은 죄송스럽기도 했다.


예배에 이어 우리를 인도 한 곳은 마굿간 동굴위에 세워진 예수탄생교회이다. 

교회의 입구는 그 높이가 낮아서 그곳을 찾는 모든 사람들이 머리를 숙이고 들어가게 되어 있다. 본래는 그 문이 높게 건축되었지만 침략자들의 말이나 마차가 들어오지 못하게 문의 높이를 낮추었다고 한다. 때문에 그곳에 들어오는 모든 이들은 모두 머리를 숙이고 들어와야 하므로  그곳을 존중하도록 하는 의미도 있다. 그 문을 일명 ‘겸손의 문’또는 ‘좁은 문’이라고 한다. 내부는 크리스마스트리를 연상하게 하는 온갖 장식물이 치렁치렁 주렁주렁 걸쳐져 있다. 그리스정교회소속이라는데 주일이라서 인지 미사가 진행되고 있었으며 그 주위를 관광객들이 둘러보고 있다. 예배에 방해가 되지 않기 위해 우리의 발길 또한 조심스럽다. 

나무 바닥 밑에는 비잔틴 시대부터 보존된 모자이크 일부가 남아 있다. 제단 양쪽 계단을 따라  밑으로 내려가면 각 종파가 소유하는 11개의 은제 램프와 예수탄생지점을 표시한 14개의 꼭짓점을 가진 은색의 별이 있다고 하나 그곳 역시 미사 중이고 밀려오는 관광객들로 인해 겨우 지하를 향해 사진 한 장 찍고 돌아섰을 뿐이다.


예수 승천 기념교회는 아주 작은 석조건물이다. 원래는 지붕이 없이 하늘을 볼 수 있는 형태였으나 이슬람교도들이 관리하면서 돔형식으로 덮어 회교사원으로 쓰고 있다는 씁쓸한 현실 
현재도 회교도들이 관리하고 있다.


성지순례중의 주일은 순례객들에겐 많은 불편함을 초래한다. 주기도문교회는 이미 시간이 늦어 들어갈 수가 없다고 한다. 인터넷상으로 많이 보아온 한글로 된 주기도문을 보고 왔어야 했는데 아쉽다. 한 도시만 제대로 보아도 며칠이 걸릴 텐데 8박9일의 일정에 3개국이니 말해 무엇하리오. 

눈물 기념교회로 가는 도중에 예루살렘을 내려다보며 마치 지도를 보고 설명하듯이 여기저기를 설명해주나 얄팍한 성경지식으로는 당시 고개만 끄덕였던 그곳이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은 이 시점에 온통 헷갈릴뿐더러 기억조차 가물거린다.
황금 돔이 빛나는 예루살렘시가지와 우리가 섰던 바로 밑의 유대교 특유의 전통 장례예식이 눈길을 끈다.  그 더운 날씨에 온통 검은 옷과 모자로 치장을 하고 머리까지 구레나룻처럼 길게 늘어뜨린 사람들과의 만남은 신기한 모습 그 자체였다. 

메시야가 올 때 그들도 부활한다고 믿고 있고 또 메시야는 예루살렘성 황금문을 통해 입성한다고 믿고 있어 근처 내려다보이는 모든 곳이 다 무덤이다.


눈물 기념교회는 특이한 건물 구조 때문에 쉽게 구별하고 알아볼 수 있다. 
눈물병모양의 구조물이 네 귀퉁이에 상징적으로 세워져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성이 무너질 것을 아시고 눈물 흘렸음을 기념하는 교회다. 
내부에서 보이는 창살은 가시면류관을 상징하며 그 사이로 보이는 예루살렘 전경이 유명하다.


이곳에서 우린 근사한 점심을 위해 이동했다. 오늘 예배를 인도하신 김욱 목사님의 교회에서 오신 집사님 댁에서 점심식사로 된장국을 준비해 놓으신다는 거였다. 
선교사님 사모님들이 모여 도시락을 준비해 주셨고 그 집사님 댁으로 도시락을 들고 된장국을 먹으로 고고 
우리나라로 치면 강남정도의 수준이라는 그곳은 정갈하게 잘 꾸며진 아름다운 2층집이었다. 주변의 풍경과 더불어 깔끔한 그곳의 풍경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우린 한국에서도 맛내기 힘든 수준의 동태찌개와 된장국 그리고 입맛이 돌게 하는 한식 도시락으로 호사를 누렸다. 며칠이나 됐다고 이다지 반갑고 맛있던지 사람이 좀 간사하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다. 
남은 도시락 두 개까지 어느 권사님이 챙겨왔다. 물론 그날 밤 그 도시락 두 개가 우리의 일용할 양식이 되리란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한 채. 
잘 먹은 후 우린 다시 순례의 행렬에 오르다.


다음으로 간곳은 마가의 다락방이다. 여행 가이드북에도 친절하게 우리나라수준의 다락방이 아니라 지붕아래의 방을 다락방이라 한다는 설명까지 되어있건만 그래도 보는 순간은 놀랍다. “무슨 다락방이 이렇게 커” 하면서 
이곳은 잡히시기 전날 밤에 예수님과 제자들이 최후의 만찬을 하셨고, 부활 후 제자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신 곳으로 꽤 의미 있는 장소중의 하나이다. 

문 오른쪽에는 메주자도 있었다. 
-메주자(Mezuza)란 유대인들의 집 대문, 방문 오른쪽 문설주에 붙여놓은 작은 상자로 속에는 말씀 두루마리가 들어있다. 문을 오갈 때 이것을 만지고 또 그 손을 입에 대는 간접키스로  하나님을 기억하고 안녕을 기도한다. 

이곳의 1층은 다윗왕의 가묘가 있는 곳이다. 다윗성에 있어야 하는 다윗왕의 묘를 찾지 못해 가묘를 만들어 기념하고 있다. 유대인들이 관리하고 있어 꽤 근엄한 곳으로 남녀가 구분되어 들어가고 남자는 머리에 모자를 써야한다. 
그만큼 신성한 곳으로 모시고 있다는 의미겠지만 남자들의 키파라고 하는 작은 모자를 쓴 모습이 보이자 목사님을 비롯한 장로님들 까지도 어찌나 귀엽게 느껴지던지 조금 전의 그 경건함은 순간에 사라지고 웃음바다다.


다음은 겟세마네 교회.  

16개 국가가 헌금을 모아 지었기 때문에 만국교회라고도 불리 운다. 정 중앙에는 예수께서 고뇌했다는 바위가 놓여 있다. 
이곳이 바로 예수께서 십자가의 고통을 아시고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눅 22:42).’ 라고 땀이 핏방울처럼 되도록 간절히 기도하셨던 곳이다. 
교회 정원에는 예수님 당시에도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아주 오래된 올리브나무 8그루가  건재하고 있다.


또 하나 나를 당황케 한 곳은 베데스다 연못이다. 
성경을 읽으면서 막연하게 떠오른 광경은 길가 한쪽에 있는 작은 연못과 그 연못이 동하기를 기다리는 병자들을 머릿속으로 떠올렸는데 이곳은 연못이라기보다는 폐허가 된 건물로 느껴진다. 
그리고  연못이라 칭하기엔 그 규모가 너무 크다. 다락방을 보고 놀란 수준 이상이다. 무슨 이게 연못이냐고 했더니 성지순례를 두 번째 오신 장로님이 물을 보여주겠노라 앞장을 서신다. 지하를 한참이나 내려오니 정말 그곳에 물이 있긴 있었다. 비둘기의 소굴인지 비둘기 털이 날리고 물이라곤 만져보고싶지도 않을 정도로 지저분해 보이는 어두컴컴한 그곳에 ‘그래도 왕년엔 바로 연못이었다우’라고 하듯이 ... 
아마도 연못이 있는 곳에 물 저장고를 지어 놓은 광경 같다.


성안나교회

이곳은 가기 전부터 나의 관심을 끌었던 곳이다. 비록 의미는 다르지만 나와 같은 이름을 쓰는 교회이니 참으로 영광이다. 성모마리아의 어머니 이름이 안나라고 한다. 마리아가 태어난 곳을 기념하는 교회로 마리아의 부모님이 살았던 집터위에 세워진 교회다. 천정의 특이한 구조로 공명이 좋아 찬양을 하면 너무 멋진 울림이 되어 들려온다. 우리 역시 국악찬양을 하신 윤성애 권사님과 포리교회 솔리스트 김재동집사의 찬양을 청해 들었다. 
상상을 초월하는 울림이다. 느리고 웅장한 곡으로 준비해 가면 자신의 역량 이상의 아름다운 소리로 되돌아 올 것이다. 
아직도 그 공명되어 나오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이제 오늘의 하이라이트가 남아있다. 시작도 하기 전부터 마음이 무겁다. 바로 십자가의 길이다. 
비아돌로로사 (Via Dolorosa)로 불리는 이 길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까지 걸어가신 고난의 길, 슬픔의 길을 말한다. 
과정마다 표시를 하여 모두 14지점으로 구분되어있다. 우리는 나무 십자가를 빌려 직접 체험해보기로 하였다. 
그 길은 온통 시장속이라서 조금만 집중하지 않으면 내가 여기 왜 있는지조차 헷갈릴 수 있는 곳이다. 
처음 십자가를 지신 분은 우리교회 목사님이시다. 이민족의 출현에 또 다른 외국인들의 플래시가 터지고 마치 구경꺼리가 된 느낌이었다. 조금은 창피하고 민망하기 그지없는 시작이었다. 그러나 ‘아 예수임도 이런 길을 가셨구나!’ 라는데 까지 생각이 미치자 혼란스런 시장통이 마치 우리의 체험을 위해 존재하고 있는 듯이 느껴졌다. 
또한 이 체험에 집중하기 위해 처음부터 끝까지 찬양을 하며 갔다. 혼자도 아닌 20여명이 뭉쳐서 가는데도 민망하기 그지없었는데 예수님이 당했을 수모의 백분의 일이라도 느껴보는 시간이지 않았을까? 
참으로 엄숙한 시간이었고 개인적으로는 소중한 체험이었다. 

골고다 언덕에 세워진 성묘교회는 규모면에서도 아주 크다. 그 안에는 십자가에 못 박힌 곳, 십자가에 달리신 곳, 묻히신 곳 등이 요란하게 치장되어 있고 인파로 인하여 완전히 국제시장바닥이었다. 개인적으로는 골고다언덕의 느낌을 바랬으나 또 기념교회이다.
단지 우리가 걸었던 돌바닥과 그 시장안의 번잡스러움만이 당시 그대로이지 않았을까? 
십자가 체험을 하며 각 사람의 분량대로 느낌은 다 달랐을 것이다.


오늘 마지막 코스는 통곡의 벽이다. 

예루살렘성(다윗성)은 6일 전쟁 때 거의 파괴되고 성전의 서쪽 벽만 조금 남아있는데 그곳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통곡의 벽이다. 
유대인들이 검정 옷과 검정모자를 쓰고 이곳에 와 벽면 돌 틈 사이에 종이에 쓴 기도문을 끼워 넣고 성경을 든 채로 벽에다 이마를 대거나 손을 대고 서서 기도를 한다.
 남자는 왼쪽 여자는 오른쪽으로 중간에 또 막이 있어 오고 갈수 없게 되어있다. 우리가 갔을 때 여자 쪽에는 사람들로 꽉 차 벽 가까이 가기도 힘이 들었다. 
 '통곡의 벽'이라는 용어는 유럽의 여행자들이 거룩한 성전 유적지 앞에서 밤을 새워 슬프게 우는 경건한 유대인들을 보고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참 잘 어울리는 이름이다. 


하루의 일정을 이렇게 마쳤다. 
오늘의 숙소는 여리고내의 인터콘티넨탈호텔이다. 호텔의 이름까지 기억하는 건 밤에 있을 사건으로 인해서다. 어제의 베들레헴은 해발 800m여서 많이 쌀쌀했고 이곳 여리고는 해발-200m라서 산소의 양이 많아 아무리 뛰어도 지치지 않고 따뜻해서 수영하기도 적당하단 가이드의 설명에 김해에서 온 ‘독수리5형제’가 이날 밤을 벼르고 있었다. 


호텔에서 저녁을 먹기 위해 접시를 들고 몇 바퀴를 돌았으나 내 접시에 올려진 것은 달랑 오이 두 쪽 , 그동안 호텔식으로 그럭저럭 잘 먹고 견뎌왔는데 도대체 여기에선 접시에 담을 것조차 없으니…….그리하여 등장한게 점심때의 그 도시락과 튜브형 고추장이다. 
부리나케 숙소로 올라가 이미 김치가 익기 시작해 시큼털털한 냄새를 풍기는 도시락을 가장 큰 접시에 쏟고 끈기라곤 한 점도 없는 밥과 섞어 ‘여리고비빔밥’을 만들었다. 현지인들이 보기엔 이 맛있는 것들을 놔두고 이상한걸 먹는다고 웃겠지만 우리에겐 이게 꿀맛인걸 어쩌랴 


서로 한 숟가락이라도 더 먹기 위해 야단이다.  그 도시락이 없었으면 이 밤을 어떻게 견뎠겠는가. 컵라면도 누룽지도 과자부스러기도 이미 바닥이 났는데……. 

배가 채워지니 다들 끼리끼리 모여 이야기꽃이 한창이다. 수영을 한번 해볼까 하는 심정으로 우리는 수영장을 향했다. 독수리 5형제가 재밌게 수영을 하다가 우리부부를 발견했다. 다이빙을 하려던 둘째 은강이가 멋있게 뒤로 다이빙을 하다가 몸이 너무 휘어진 나머지 머리를 벽에 부딪치고 만다. 물속에서 꺼멓게 번져 나오는 그 무엇 아! 피였다. 

그날 밤 호텔 측에서 관리인이 뛰어오고 씻고 있던 인솔자가 놀래서 튀어나오고 현장을 지켜보던 우리는 괜스레 미안하고.. 
결국 상처부위를 꿰매야 한다고 병원으로 가기로 결정,  여리고 내엔 그 정도의 병원도 없다고 베들레헴까지 가야한다고 한다. 인류 최초의 도시 여리고에 가장 기본적인 의료시설조차 없다니 그 사실이 더 기가 막혔다. 

저녁 늦게 돌아온 은강이 머리에는 리본하나가 달려져 있었다. 그녀석의 쑥스러워하는 표정을 잊을 수 없다. 다행히 여리고 내에서 치료 할 수 있었고 모든 비용은 호텔 측에서 부담하였다. 

우리보다 훨씬 못사는 나라에서 자기가 실수한 것인데 그렇게 책임져 주겠다고 하니 어린 아이 소견으로는 너무 미안하고 감사하고 그랬나보다. 은강이에겐 이 호텔로 인해 이스라엘까지도 고마운 나라가 되어 버렸다. 

한 아이가 다쳤지만 '왜 하필'이란 생각보다는 그 와중에도 선한 길로 인도해 주실 것임을 믿고 감사기도를 드릴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 크리스천이 가진 가장 큰 힘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며 칠일째의 밤을 맞는다.




성지순례 팔일째 그리고 마지막

오늘이 이곳 이스라엘에서의 마지막이자 성지순례의 마지막 날이다. 
남은 하루는 비행기 안에서의 일박이니 오늘로 그 동안의 일정을 마치는 것이다. 
지나고 보니 너무 짧다는 생각과 어느 여행과 마찬가지로 아쉬움만이 자리한다. 

오늘의 일정은 마사다 요새를 들러보고 다시 이집트로 들어가 카이로에서 비행기를 타는 것으로 마친다. 요즘에는 이스라엘까지의 직항로가 있어 굳이 카이로공항을 이용하지 않아도 되는데 우리가 갔을 때만해도 그렇지 않았으니 불과 몇 달 전의 여행이 아주 오래된 것처럼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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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사다는 히브리어로 요새라는 뜻이며 이스라엘 최후 항전지로 알려져 있다. 이스라엘 남쪽의 거대한 바위 절벽에 자리 잡은 고대의 왕궁이자 요새를 말한다. 
73년 제1차 유대-로마 전쟁 당시 끝까지 로마군에 항거하던 유대인 저항군이 로마군의 공격에 패배가 임박하자 로마군의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해 제비를 뽑아 서로를 죽였으며 최후에 2인이 남아 한명을 죽이고 남은 한명은 자살했다고 한다. 유대인 율법은 자살을 금했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죽였다고 하는 얘기만이 이곳의 비장미를 더해주고 있다.


이제는 다시 광야길을 달려 이집트로 향한다. 
광야로 내달리는 버스 속에서 이번 여행의 정리를 해보며 훌쩍 지난 8박9일의 일정과 염려했던 것보다도 더 잘 견뎌준 나의 몸과 가정과 일터 모든 곳에서 별 탈 없음에 감사하기만 하다. 

광야길 한편에서 만난 싯딤나무 
물이 귀한 이곳에서도 크게 잘 자란 이 나무의 습성을 알고 새삼스레 감격하다. 
땅속 깊은데 까지 뿌리내려 생명에 필요한 물을 취하여 어느 나무보다도 단단하게 잘 자라는 싯딤나무는 일명가시나무로 불릴 만큼 볼품없고 뒤틀린 나무로 자란다. 그러나 그 볼품없음을 보지 않으시고 내면의 단단함과 강인함을 보시고 법궤를 만드는 재료로 취하여진다. 광야로 내달리는 길 한쪽에서 만난 싯딤나무 한그루는 우리네 삶과 연관을 지어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환한 낮에 도착한 이집트 카이로 공항은 밤에 보았을 때보다도 더 실망스럽다. 
도착했을 때에는 밤이라서 제대로 보지 못 했지만 낮에 본 공항은 정말 초라하기 그지없다. 

학창시절 고대문명의 발상지인 이집트를 막연히 동경했었는데, 지금의 시대에서 바라본 이집트는 과거의 흔적만을 부둥켜안고 살아가는  죽은 자들의 도시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시골 완행버스 대합실 같은 곳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시내산을 같이 오르고 사진도 함께 찍었던 ‘마호메트’ 가이드를 만나니 반가움이 앞선다. 
가방 한쪽에 쓰고 남은 볼펜 몇 자루를 쥐어주니 그의 표정이 너무나 밝아진다. 적은 것으로 생색을 낼 수 있는 이곳, 원달러로도 그들에게 순간의 행복을 줄 수 있는 곳, 알량한 자만심을 충족시킬 수 있었기 때문일까? 내가 베풀고서도 뿌듯함과는 달리 편치 않은 그 뭔가가 있다. 

돌아오는 비행기 속에서는 안락함을 만끽하며 푹 잔 것 같다. 길고 지루하기만 했던 출발과는 달리 금세 인천공항이다. 
도착과 동시에 찾은 화장실. 아! 그 쾌적함이라니……. 
남들과 똑같은 말은 결코 하고 싶지 않지만 ‘역시 우리나라가 제일이다’ 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공항에서 교회로 오는 길에 가장먼저 들른 곳은 역시 삼겹살집이다. 현지 음식 또한 그다지 거부반응 없이 잘 먹고 잘 지냈음에도 불구하고 온 몸이 삼겹살 김치 등을 간절히 원하고 있으니 음식문화가  무시 못할 만큼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음을 몸으로 느낀 며칠간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속에서 우리는 이미 제2차 성지순례를 꿈꾸고 있었다. 2년 후 아마도 터키를 비롯한 사도 바울의 흔적을 따라가고 있지는 않을까 하는 행복한 상상을 해본다. 

이렇게 병아리집사는 8박9일의 성지순례를 마쳤다. 
병아리에서 조금 벗어나보고자, 그리고 크리스천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가봐야 한다기에 그렇다면 조금이라도 일찍 가는 게 낫겠다는 생각에서 떠난 성지순례가 2008년 한해의 가장 의미 있는 일이었다. 

우리부부만이 떠났다면 어찌 이 많은 감동을 안고 왔을까? 
좋은 사람들과 함께여서  행복했고, 또 좋은 사람을 만나는 계기가 되어서 더욱 행복했음을 고백한다. 
성경을 볼 때마다 그리고 순간순간 이 여행에서 얻은 감동으로 인해 내 삶이 풍요로워질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집사님 성지순례 다녀온 후 표정이 달라졌어요.” 라던 어느 집사님의 말처럼 비록 나는 느끼지 못할지언정 나의 내면에서는 또 다른 변화가 일고 있으리라 믿는다. 
어쭙잖은 글 솜씨와 기억의 한계로 인해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주관적으로 쓴 글도 많고  큰 감동을 받았으나 여행기속에 녹여내지 못한 얘기도 많이 있다.


성지순례를  8일 동안에 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였으며 아는 만큼 보인다는 얘기는 바로 이럴 때 쓰는 말임도 알았다.  
나무만 본채 숲은 보지 못하고 온 것이 그 무엇보다 아쉬울 뿐이다. 성경을 더 많이 읽고  맥을 짚고 갔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가장 크게 자리한다. 

하지만 설사 그리 하였다 하더라도 또 다른 아쉬움이 남을 것이기에 감히 이정도로도 충분히 만족하며 감사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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